문득 허기가 찾아올 때가 있다.
위장이 비어 느끼는 생리적 굶주림이라기보다, 마음 한구석이 텅 비어버린 듯한 강렬한 그리움에 가깝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어머니의 밥상이 간절해진다.
어머니의 김치는 늘 두 갈래였다.
생김치를 좋아하는 나와 신김치만 찾는 동생의 입맛을 맞추느라, 어머니는 매번 번거로움을 자처하셨다.
"입맛도 제각각이라 고단하다"라며 짐짓 타박을 섞으면서도, 기어코 통 두 개를 따로 꺼내시는 뒷모습.
자식들이 떠난 집안이 얼마나 적막하고 외로웠을지 이제야 짐작이 가는데, 당신은 그저 자식이 집에 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 적막을 기쁨으로 채우시는 분이었다.
어린 시절, 우리 가족이 낯선 동네로 이사를 왔을 때 코흘리개들의 텃세는 만만치 않았다.
그들만의 견고한 울타리를 주눅 든 아이가 뚫고 들어가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때 나보다 더 애달파하며 나를 세상 밖으로 밀어주던 분이 어머니였다.
"자식 몸에 작은 생채기 하나만 나도 부모 가슴에는 시퍼런 피멍이 드는 법이다"라며, 행여 내가 밖에서 마음이라도 다쳐 올까 봐 당신은 늘 나를 애지중지 귀하게 보듬으셨다.
어머니의 그 '어화둥둥'은 정월 대보름 밥상 위에서도 빛났다.
집집마다 돌며 얻어온 나물들을 커다란 양푼에 넣고 비빌 때, 어머니는 단순히 나물만 얹어주지 않으셨다.
친구들과 잘 지내라는 당부와 함께 귀한 계란후라이를 부쳐 밥 위에 살포시 얹어주셨다.
그 노란 계란 하나는 낯선 동네에서 주눅들어 있던 자식을 향한 응원이자, 기죽지 말라는 어머니만의 당당한 명함이었다.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은 언제나 열정적이었다.
무심했던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우듯, 어머니는 매사 적극적으로 나의 기를 살려주셨다.
대보름의 절정인 쥐불놀이가 시작될 때면 어머니는 직접 빈 깡통을 구해와 못과 망치로 구멍을 뚫고 철사를 엮어 놀이통을 뚝딱 만들어 주셨다.
혹여나 부실할까 아빠를 채근해 손을 봐주라 하시고, 남들보다 더 큰 불꽃을 그리라며 큼지막한 통을 구해다 주셨던 기억.
너무 큰 통 탓에 돌리는 손목이 외려 고단했지만, 밤하늘에 커다랗게 그려지던 불의 궤적은 곧 나를 향한 어머니의 자부심처럼 느껴졌다.
동네 부녀회장을 맡고 농협 대의원을 지내며 여장부 역할을 톡톡히 해내시던 어머니.
당신은 뒤따르기보다 앞장서서 길을 내는 분이셨다.
사람들은 그런 어머니를 가장 많이 닮은 사람이 바로 나라고 말한다.
뒤처지기보다 이끄는 것을 좋아하는 나의 기질 속에는, 자식의 상처를 피멍으로 견디며 나를 세상의 주인공으로 키워내신 어머니의 기개가 흐르고 있다.
오늘 느껴지는 이 허기는 아마도 내 안의 뜨거움이 잠시 식었을 때 찾아온 신호일지도 모른다.
어머니가 정성껏 부쳐주신 계란후라이처럼, 나 또한 누군가에게 따스한 온기를 전하는 존재가 되어야겠다.
나를 ‘어화둥둥’ 키워낸 그 억척스럽고도 고결한 사랑을 생각하며, 마음속에 다시금 힘차게 불꽃을 돌려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