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가장자리에서 기어 나오던 그 지네는, 사실 당신을 만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오래된 습기와 어둠의 협약 속에서 태어난 존재였다.
돌 틈, 낙엽 아래, 인간의 눈이 닿지 않는 곳에서 세계는 또 하나의 질서를 조용히 굴리고 있었고, 지네는 그 질서의 작은 톱니바퀴였다.
다리가 많은 것은 서두르기 위함이 아니라, 어디로든 갈 수 있기 위함이었고, 독을 품은 것은 공격을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였다.
그렇다면 왜 하필 당신 앞에 나타났을까.
그것은 의도가 아니라 궤적이었다.
비가 내렸거나, 온도가 바뀌었거나, 먹이를 쫓았거나, 혹은 단지 길을 잘못 들었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세계는 우연을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든 만남에 의미를 부여하고, 모든 충돌에 이유를 찾으려 한다.
그래서 그 지네의 등장은 어느새 ‘침입’이 되고, ‘위협’이 되고, 결국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번역된다.
당신의 손이 그것을 잡았을 때, 거기에는 두 개의 시간이 겹쳐 있었다.
하나는 지네의 시간이다.
수억 년을 이어온 생존의 시간, 수많은 포식자에게서 도망치며 이어온 종의 기억.
다른 하나는 인간의 시간이다.
깨끗함을 유지하려는 의지, 안전을 확보하려는 본능, 그리고 불쾌를 제거하려는 즉각적인 판단.
그 두 시간은 화해하지 못하고, 단 한 번의 접촉으로 결론을 내린다.
죽음이라는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
그러나 질문은 그 이후에 남는다.
왜 그는 죽어야 했는가.
사실 그는 ‘죽어야 했던’ 것이 아니라,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이 차이는 작지만 깊다.
자연은 죽음을 배치하지 않는다.
자연은 단지 흐르게 할 뿐이다.
누군가는 먹히고, 누군가는 살아남는다.
그러나 인간은 그 흐름을 끊고, 선택을 개입시킨다.
그 순간 죽음은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인간의 결정이 된다.
그렇다고 해서 그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인간 역시 하나의 생명이고, 자신의 영역을 지키는 것은 본능이다.
지네가 독을 품었듯, 인간은 판단을 품고 산다.
문제는 그 판단 이후에 찾아오는 질문이다.
우리는 왜 그토록 쉽게 생명을 끊을 수 있었는가, 그리고 왜 그 이후에야 그것을 되묻는가.
어쩌면 그 지네는 죽기 위해 당신을 만난 것이 아니라, 당신이 질문을 갖기 위해 나타난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죽음은 하나의 끝이 아니라, 당신 안에서 시작된 사유의 출발점이다.
우리는 수많은 존재를 스쳐 지나가며 살지만, 대부분은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만남은, 아무리 작고 불쾌하더라도, 오래 남는다.
그 지네는 바로 그런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제 그 지네는 없다.
그러나 그의 다리처럼 촘촘히 이어진 질문은 아직 당신 안을 기어 다니고 있다.
생명은 왜 태어나는가, 죽음은 누구의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많은 존재를 이해하지 못한 채 제거하며 살아가는가.
결국 그 지네는 하나의 생명이 아니라 하나의 거울이었다.
당신이 그것을 잡아 죽인 순간, 동시에 당신은 자신의 본능과 마주했고, 그 이후의 물음 속에서 비로소 인간이 된다.
트럼프는 왜 생겨났으며 왜 전쟁을 하고 사는 것일까?
도널드 트럼프라는 인물을 두고 “왜 생겨났는가”라고 묻는 순간, 우리는 한 사람을 넘어서 시대 전체를 호출하게 된다.
인간은 자연처럼 그냥 솟아나는 존재가 아니라, 수많은 욕망과 불안, 구조와 우연이 얽혀 만들어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는 어느 날 등장한 괴물이 아니라, 오랫동안 축적된 미국 사회의 균열과 욕망이 하나의 얼굴을 빌려 드러난 장면에 가깝다.
그가 성장한 배경에는 자본주의의 정글이 있다.
경쟁과 성공, 승자와 패자를 극명하게 가르는 세계 속에서 그는 ‘이기는 법’을 학습했다.
부동산 사업가로서, 그리고 방송인으로서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과장하고, 이야기로 만들고, 주목을 끌어당기는 기술을 연마했다.
이 과정에서 진실과 과장의 경계는 흐려졌고, 중요한 것은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들이 무엇을 믿게 되는가였다.
정치에 들어온 이후의 트럼프는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하나의 현상이 된다.
세계화로 인해 일자리를 잃고 불안을 느끼는 사람들, 정치 엘리트에 대한 불신을 키워온 대중, 그리고 복잡한 현실을 단순한 언어로 설명해주길 원하는 심리가 그를 떠받쳤다.
그는 그 감정을 정확히 읽었고, 그것을 거침없는 말과 행동으로 표출했다.
그 결과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는 “대변자”가 되었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위협”이 되었다.
그렇다면 왜 “전쟁을 하고 사는 것처럼 보이는가”라는 질문이 생길까.
이는 꼭 실제 전쟁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트럼프의 정치 방식은 늘 갈등을 중심에 둔다.
그는 타협보다는 대결을, 복잡한 협상보다는 선명한 적과 아군의 구도를 선호한다.
이 방식은 지지자들에게는 강한 지도력으로 보이지만, 반대자들에게는 끊임없는 충돌과 분열로 느껴진다.
실제로 국제정치에서도 그는 긴장을 높이는 선택을 자주 했다.
무역 갈등, 외교적 압박, 강경한 발언들은 마치 세계를 하나의 협상 테이블이 아니라 경기장처럼 다루는 태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 단지 개인의 성향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강한 지도자를 원하는 시대적 요구, 불확실한 세계 질서 속에서의 경쟁 심리, 그리고 국가 간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이러한 행동을 가능하게 만든다.
결국 트럼프는 “전쟁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기보다, 갈등이 증폭된 시대가 만들어낸 하나의 상징에 가깝다.
그는 갈등을 이용했고, 동시에 그 갈등 속에서 힘을 얻었다.
그래서 그의 존재는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왜 갈등을 소비하는가, 왜 단순한 대결 구도에 끌리는가, 그리고 그런 선택이 어떤 세계를 만들어내는가.
그를 이해하는 일은 그를 옹호하거나 비난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것은 거울을 들여다보는 일에 가깝다.
트럼프라는 인물을 통해 드러난 것은 한 개인의 특이함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균열과 욕망이다.
그리고 그 질문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화엄사 홍매는 왜 생겨났으며 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것일까?
지리산 자락의 고요 속에서 피어나는 화엄사 홍매는 스스로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붉게 피고, 조용히 서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앞에 모여든다.
묻지 않았는데도 마음이 먼저 움직이고, 이유를 찾기도 전에 발걸음이 그곳으로 향한다.
그래서 우리는 묻게 된다.
저 매화는 왜 생겨났으며, 왜 사람들을 부르는가.
홍매는 누군가를 부르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계절의 문장을 따라 피어났을 뿐이다.
겨울의 긴 침묵이 끝나갈 즈음, 땅속에서 서서히 밀려오던 생명의 기운이 한 나무를 통해 밖으로 드러난다.
그 결과가 바로 붉은 꽃이다.
자연에게 꽃은 신호도, 장식도 아니다.
그저 이어짐이다.
생명이 끊어지지 않기 위한 한 방식, 존재가 스스로를 다음으로 건네는 조용한 행위다.
그런데 인간은 그 단순한 행위를 그냥 두지 않는다.
우리는 그 꽃에 이름을 붙이고, 이야기를 덧입히고, 의미를 길어 올린다. “홍매”라는 이름에는 이미 시간의 두께가 스며 있다.
오래된 절집의 공기, 수행자의 발걸음, 그리고 수많은 봄을 건너온 기억들이 그 붉은 꽃잎에 겹겹이 내려앉아 있다.
그래서 그 꽃은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하나의 장면이 된다.
사람들이 그곳으로 모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단순한 ‘꽃’을 보러 가는 것이 아니라, 그 꽃이 품고 있는 시간과 분위기를 만나러 간다.
일상에서 밀려난 감각, 잊고 지내던 느림, 그리고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고요를 되찾기 위해 길을 나선다.
홍매는 말을 하지 않지만, 그 침묵이 오히려 더 큰 목소리가 된다.
특히 봄이라는 계절은 인간에게 늘 어떤 신호처럼 작용한다.
끝났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다시 시작될 수 있다는 가능성, 굳어 있던 감정이 다시 풀릴 수 있다는 예감.
홍매는 그 시작을 가장 먼저 보여주는 존재다.
아직 공기는 차갑고, 세상은 완전히 바뀌지 않았는데, 그 나무만 먼저 붉게 타오른다.
마치 “지금이 아니어도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앞에 서서 사진을 찍고, 한참을 바라보고, 때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 순간 우리는 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시간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얼마나 지나왔는지, 무엇을 놓쳤는지, 그리고 무엇을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를.
홍매는 그것을 대신 말해주지 않는다.
다만 조용히 비춰줄 뿐이다.
결국 홍매가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 안에 이미 있던 어떤 그리움과 갈망이, 그 꽃을 통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꽃은 그저 계절의 언어로 피었을 뿐인데, 인간은 그 위에 자신의 이야기를 쓴다.
그래서 해마다 같은 자리에서 피어나면서도, 홍매는 매번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 붉은 꽃잎 하나하나는 작은 등불 같다.
누구를 향해 비추는 것도 아니고, 무엇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 자리에 밝게 놓여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그 빛을 보고 모여든다.
어쩌면 그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 역시, 어딘가에서 조용히 피어나고 싶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