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다 못해 검어진 눈물, 그 통곡의 가시가 세운 세 가지 이정표 전남교육 현직이라는 분주한 무대를 내려와 ‘퇴직학교 4학년’이라는 고적하고도 깊은 사유의 고도(高度)에 들어선 지금, 2026년 5월 18일의 엄숙한 아침을, 나는 오늘 맞이합니다.
거대 담론의 소음에서 한 걸음 물러나 본질을 가장 투명하게 응시할 수 있는 생의 정점에서, 46주년을 맞이한 오월의 광장은 우리에게 여전히 마르지 않는 심연의 거울입니다.
우리는 오랜 시간 오월을 희생의 흰빛으로만 묶어두었습니다.
흰 국화가 가진 순결한 눈물이나 이팝나무 꽃이 가진 슬픔의 액자는 숭고하지만, 그날의 광주를 지나치게 수동적인 슬픔 속에 가두어 두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전국의 국민과 함께 그날의 통곡을 온전히 마주하기 위해, 저는 가장 깊은 어둠 속에서만 스스로의 빛깔을 완성하는 ‘흑장미(Black Rose)’의 언어를 광장 위에 바치고자 합니다.
흑장미의 검붉은 안간힘은 부당한 폭력이라는 거대한 슬픔을 내면으로 삼키고 응축하여, 마침내 ‘존재의 존엄’이라는 비가역적 아름다움으로 터뜨려 낸 항거의 근력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흑장미의 시선으로 이 오월을 되비추어, 그 아득한 거울 방 속에서 펼쳐지는 대한민국과 광주의 숭고한 궤적을 추적합니다. 1.
헌법 전문에 새길 오월의 준엄한 정신 첫 번째 약속은 ‘오월 정신의 헌법 전문 수록’이라는 영원한 성찰의 문장입니다.
흑장미의 줄기에 돋아난 날카로운 가시는 결코 타인을 해치기 위한 무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침략자와 억압자를 향한 단호한 거부이자, 자아를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실존적 방어 기제였습니다. 1980년 5월, 광주의 시민들이 총을 들 수밖에 없었던 당위성이 바로 이 가시의 발현이었습니다.
이 약속은 역사의 가시를 대한민국 최상위 규범인 헌법 전문이라는 액정 속에 고스란히 전사(傳寫)하는 행위입니다.
비명은 이제 사라지지 않을 국가의 근본 이념으로 복제되어 무한한 주권의 권리로 되비쳐집니다.
헌법에 새겨질 오월은 흔들리는 정치적 수사가 아닙니다.
불의한 권력이 다시는 이 땅에 돋아나지 못하도록 국가의 가장 깊은 심장에 박아 넣은 ‘제도화된 흑장미의 가시’이며, 미래 세대가 위기의 순간마다 꺼내어 볼 불멸의 소실점입니다. 2.
옛 전남도청의 성지화: 핏빛의 대지, 흑장미의 향기를 뿜는 세계의 관문으로 두 번째 약속은 ‘옛 전남도청의 K-민주주의 성지화’라는 공간의 온전한 복원입니다. 1980년 5월의 전남도청은 세상에서 가장 차갑고 외롭게 고립된 봉오리였습니다.
생과 사가 갈리고, 흑장미의 검은 눈물이 대지를 적셨던 비극의 원점이었습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그 검붉은 빛을 더해가는 흑장미의 생태처럼, 도청은 서슬 퍼런 압제 속에서 가장 고귀한 희생의 압력을 견뎌내던 응축의 공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반세기에 가까운 시간을 지나 마침내 정식 개관하는 오늘의 도청은, ‘세계 시민이 찾는 민주주의의 성지’라는 거대한 액자 속으로 확장되어 투사(Projection)됩니다.
과거의 도청이 죽음을 삼키는 검은 봉오리였다면, 오늘의 도청은 그 죽음을 자양분 삼아 세계를 향해 평화와 연대의 가치를 뿜어내는 ‘방사형 개화’의 현장입니다.
흑장미의 겹겹이 쌓인 꽃잎이 안에서 밖으로 펼쳐지듯, 옛 도청의 창문과 벽에 남은 탄흔들은 이제 세계 곳곳에서 독재와 싸우는 이들의 눈동자 속으로 끊임없이 복제되어 흐를 것입니다.
광주는 이제 외로운 섬이 아니라, 세계 민주주의라는 거대한 바다를 비추는 가장 투명한 거울입니다. 3.
직권 등록 제도의 도입: 이름 없는 검은 꽃잎들을 국가의 품으로 수렴시키다 마지막 세 번째 약속은 ‘5·18 민주유공자 직권 등록 제도’의 천명입니다.
흑장미 한 송이가 피기 위해서는 화려한 꽃왕관뿐만 아니라, 형체도 없이 바람에 흩어져 간 수많은 이름 없는 잎사귀들의 헌신이 필요했습니다.
그동안 연고가 없다는 이유로, 혹은 직계 가족이 없다는 이유로 국가의 기억 밖에서 쓸쓸히 시들어갔던 무명(無名)의 열사들은 부서진 검은 꽃잎 파편과도 같았습니다.
새로이 선언된 ‘직권 등록’은 국가가 스스로 거울이 되어, 그동안 가려져 있던 고독의 파편들을 찾아내어 하나의 완결된 흑장미의 우주로 재구성하겠다는 의지의 투영입니다.
국가가 희생자의 가족이 되겠다는 다짐은, 개별적 소외의 액자들을 국가라는 거대한 연대의 프레임 안으로 모아 들이는 포용의 예술입니다.
흩어진 꽃잎 하나하나가 제 이름을 찾고 흑장미의 단단한 줄기 위로 전사될 때, 오월의 완결성은 비로소 조화를 이루며 슬픔을 넘어선 정의를 실현합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겨울이라는 차가운 압제의 액자를 끊임없이 통과해 왔습니다.
불과 얼마 전 우리가 목도했던 위기 역시 역사가 퇴행할 수 있다는 거울 방의 공포였으며, 오월의 질문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상기시킨 인고의 구간이었습니다.
가혹한 계절은 우리를 흔들었지만, 오월 정신은 결코 꺾이지 않는 흑장미의 목질(木質)과도 같은 단단함으로 다시 중심을 잡았습니다.
대한민국은 그 어둠을 뚫고 다시 오월의 광장에 섰습니다.
흑장미의 근력은 바로 이 겨울을 견뎌내는 유연하고도 단단한 의지에서 나옵니다.
외부의 압력이 강할수록 내부의 밀도를 더해가던 검은 봉오리가 마침내 세 가지 약속이라는 찬란한 빛의 줄기를 뻗어낸 것입니다.
가장 깊은 상흔(검은 빛)을 가장 고귀한 가치(장미)로 치환해내는 영혼의 연금술이 오늘 이 광장에서 완성되고 있습니다.
전국의 모든 국민과 함께 호흡하는 마음으로, 오늘 선언된 세 가지 약속을 가슴 깊은 곳에 엄정히 아로새깁니다.
이 약속들은 단순히 통치자가 던지는 시혜적 선언이 아닙니다.
그것은 46년 전 도청을 지켰던 청년들의 눈빛이 오늘을 사는 우리의 양심을 향해 던진 질문에 대한, 역사와 국가의 가장 정직한 응답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 세 가지 액자가 다시는 깨어지지 않도록, 아이들과 마주하는 교육의 대지 위에, 그리고 우리의 일상이라는 삶의 캔버스 위에 끊임없이 복제하고 투사해야 합니다.
압제를 뚫고 피어난 흑장미의 짙은 향기가 시간의 소실점을 향해 뻗어 나가 대한민국의 모든 영혼에게 인간 존엄의 찬란한 유산으로 전해지기를, 오월의 푸른 하늘 아래서 고요히 염원합니다.

